●---佛法僧의道

절은 복을 비는 곳이 아니다.

天 山 2012. 2. 20. 22:31

절은 복을 비는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불자들은 복을 빌기 위해 절에 나오고 있으며,
사찰도 이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대개의 사찰들은 법회와 설법을 통해 불자들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기복신앙을 부채질하는 행사로 북적댄다.

청담 스님께서는 생전에 말씀하시길 "산신·조왕·칠성·용왕 등이나
잡신을 믿는 미신행위는 바보가 되고 상스럽고 천하게 되어 태어난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불공해 봐야 잘 안되니 칠성기도를 해보고,
부처·칠성·산신 중 어떤 것이 더 영특하고 영험한지
시험해보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 불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고
어떻게 해야 복을 짓고 죄를 없애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중아함 제 3권 <도경(度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은 바에 의하면
모든 것은 인과 연이 합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육계(地.水.火.風.空.識)가 합하여 어머니의 태에 태어나고,
그로 인하여 육처(眼.耳.鼻.舌.身.意)가 생기고,
육처로 인하여 감각이 생기고, 감각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긴다.

괴로움은 집착에 의해 일어나며, 괴로움을 멸하면 참다운 행복이 성취된다.
참다운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바른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자는 괴로움의 현실을 알아야 하고(苦諦),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야 하며(集諦),
괴로움이 멸한 상태를 증득해야 하며(滅諦),
괴로움을 멸하는 도를 닦아야 한다.(道諦)"

다시 말해 괴로움을 멸하고 영원한 행복인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인과 연의 상관관계에 의해 생겨난다는
연기의 진리(綠起法)를 바로 알고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간단하게 말하면 이와 같은 교리를 믿고 실천하는 종교다.
불교신행은 이 궤도에서 벗어나면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한 외도의 '어리석은 믿음' 이 된다.

누구나 사람은 복을 바란다.
기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행위 가운데 기복이 아닌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은 기복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기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로 하여금 불행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다.
《우바새계경》에 의하면 세 가지 '복전(福田)'이 있다.
경전(敬田)·보은전(報恩田)·빈궁전(貧窮田)이다.
경전은 불·법·승 삼보요, 보은전은 부모요
빈궁전은 빈곤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는 바로 이 세가지인 바,
복을 받는 행위는 삼보를 공경하는 것이요,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복을 비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인 기도는
현상적·물질적 풍요를 요구하는 방편이 아니라
이타적 실천의 맹세인 서원(誓願)으로 회향되어야 한다.

<수미정사 종연스님>